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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홍주 1000년 지명 유래를 찾아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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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 특집

[기획] 홍주 1000년 지명 유래를 찾아 4

홍주 지명 되찾기의 의미

홍주아문

[굿뉴스365] 홍주 지명 되찾기 운동이 시작된 지 2년여 만인 2018년이 홍주 지명 1000년으로 비정되었다.

역사서에 홍주란 이름이 처음 나온 것을 고려 현종 9년(1018)으로 보기 때문이다.

당시 고려는 거란의 2차 침입(1010)으로 인해 현종이 나주까지 몽진을 하는 수난을 겪은 후 지방행정제도 변혁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현종은 앞서 성종 2년(983)에 마련된 12목(牧)체계와 10도제(성종 14년 995)가 절도사를 중심으로 한 군역체제로 몽진 길에 올랐다가 여러 차례 험난한 상황에 처한 바 있다.

이후 군현제를 중심으로 한 지방행정제도의 변혁을 통해 중앙집권국가의 변모를 갖출 요량으로 지방행정 체제를 2원적으로 변모시켰다. 이것이 고려시대 지방행정의 근간이 된 오도양계제(五道兩界制)이다. 홍주 지명 되찾기 천년을 맞아 홍주지역의 지명 연원에 대해 고찰코차 한다. /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1. 홍주 지명의 기원

2. 홍주 지명의 역사적 조명

3. 홍주와 인근 지명의 변천사

4. 홍주 지명 되찾기의 의미


4. 홍주지명 되찾기의 의미

홍성(洪城)은 일제가 의도적으로 ‘홍주(洪州)’를 고친 이름이라고 볼 수 있다.

충청지방에서는 지금도 큰 고을 명칭에 '주(州)'를 붙이고 있다. 충청지역에선 관찰사가 주둔하고 있던 공주(公州)나 충주(忠州), 청주(淸州)가 그런 고을들이다. 그러나 고려시대부터 공주, 충주와 같은 목사가 있었던 홍주가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 때 홍성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오늘에 이르렀다.

하지만 지금도 홍성 사람들은 스스로를 '홍주인'이라 부른다. 홍성읍을 둘러 싼 1.7㎞의 성곽이 '홍주성'이며, 홍성읍은 예로부터 '홍주골'로 불러온 고장이다. 지금의 군청 정문 옆에는 옛날 홍주목사가 집무를 보았던 안회당과 외삼문인 '홍주아문'이 서 있다. 그런가 하면 홍주의 진산(鎭山)인 백월산에는 '홍주정난사'라는 옛 사당이 있어서 홍성의 그전 이름이 홍주인 것을 증언하고 있다.

'홍주'라는 이름은 역사가 천 년이 다 되어가는 지명이다. 운주라 불리던 홍주는 고려 현종 9년(1018년)때에 이르러 3군 11현이 내속했고 1358년(공민왕 7) 목(牧)으로 올리고 5군 14현을 관할하였으며 조선 초기에도 홍주목이었다가 세종 때는 목사가 첨사를 겸하기도 하였다.

더욱이 조선 인조 때 충남지방을 한때 공홍도(公洪道)라 부른 것은 충남 지역의 계수관(界首官)인 공주(公州)와 홍주(洪州)의 머리글자를 합해서 만든 도 지명이다. 1895년에는 충남도를 공주부와 홍주부로 나누었고, 이 때 홍주는 관찰사를 두어 20여 개의 군을 관할할 만큼 충남 서부지역을 대표하는 고을이었다. 지금의 '홍성(洪城)'은 1914년 일제에 의해 행정구역 폐치 분합시 홍주군과 결성군을 합해, 두 고을 중 홍주군의 '홍(洪)'과 결성군의 '성(城)'자를 따서 만들어진 합성 지명이다.

일제가 홍주 고을 이름을 바꾸고자 하였던 데는 저의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홍주성이 일제에 끝까지 저항한 고을이었기 때문이다. 1905년 일제의 강압에 의하여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되었고, 이에 전참판 홍주의 민종식을 중심으로 의병들이 항거하였다. 1906년 3월 홍주성에서 일본군과 의병 사이에 치열한 전투 끝에 홍주성이 함락되었고, 이때 900여 명이 홍주성에서 순국했다. 이들의 유해는 방치되다시피 했다가 광복 후 비로소 홍주 남산 부근에 모셔지게 됐다. 그러나 일제에 의하여 빼앗긴 '홍주'라는 이름은 되찾지 못한 채 아직도 '홍성'으로 불려지고 있는 것이다.

홍주는 역사와 인물의 고장이다. 이 지방 출신으로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끈 김좌진(金佐鎭)장군을 비롯해 3.1운동 기미독립선언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인 만해(卍海) 한용운(韓龍雲) 선생, 단발령에 반발해 홍주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이후 기호유림을 대표해 파리장서를 작성했던 지산 김복한 선생, 임진왜란을 틈타 일어난 이몽학의 난을 진압한 홍가신 목사, 더 거슬러 올라가면 조선 세조 2년 단종 복위사건의 중심인물인 사육신 성삼문(成三問), 고려의 최영(崔瑩) 장군이나 보우화상, 홍주의 개조라 할 수 있는 운주성주 긍준 등 수많은 역사와 인물들을 배출한 고장이 바로 홍주이다.

홍성군과 군민들은 옛 호서지방의 웅도(雄都)로서 '홍주'라는 이름을 되찾기 위해 노력해 왔으며 특히 2015년 홍성군의회가 조례를 제정하고 2016년부터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나서 '홍주 지명 되찾기 운동'을 벌이고 있어 주목된다.

홍성이란 지명이 일제의 잔재이기도 하지만 정체성 또한 찾을 수 없다. 유구한 역사를 지닌 홍주라는 지명으로 복원하고 지역 정체성을 확립하고 홍주인이 가진 자부심이 발양 될 수 있도록 옛 이름인 ‘홍주(洪州)’로 복원함이 마땅하다.

그리고 이 지역으로 충남도 청사 이전이라는 사실에 맞춰 과거 홍주의 영화를 되살리려는 노력도 게을리 해서는 안 될 것이다.

홍주지명 되찾기 운동은 충분한 필요충분조건을 갖추고 있으나 정확한 역사 사료의 고증을 거쳐 시기나 명칭 등에 대한 명분을 찾아야 한다. 행정의 편의나 일부 인사들의 조급성 때문에 역사를 왜곡시키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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